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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대중당

last modified: 2014-01-17 09:08:13 Contributors

제2공화국 시기 활동했던, 대한민국의 혁신(진보)정당.[1] 약칭 사대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혁신 정당의 재건을 목표로 舊진보당 간부들과 주혁신당등 혁신세력 일부가 결집해 결성되었다. 1960년에 당 조직되었다.

사회대중당은 "4.19혁명의 완수를 저지·반전시키려는 일체의 반동 세력과 혁명의 진행을 억제·침체시키고 협소한 당파적 이익만을 얻으려는 일체의 기회주의적 보수 세력과 과감히 싸울 것"을 결의하고 이어 "농민, 노동자, 지식인·중소 상공업자 및 양심적 자본가 등의 대변자가 되지만 결코 계급주의적 입장을 의미하지 않는다"것 당령으로 밝혀 "민주 혁명의 완수와 평화적 통일의 실현 및 민주적 복지 사회의 실현이라는 역사적 민족적 과제를 담당, 완수하는 것"을 밝혔다.

정강 및 정책은 다음과 같다.

  • 유엔 감시 하의 자유 선거를 통한 평화적 민주적 국토 통일 달성 등 4가지의 통일 및 외교 정책.
  • 3.15부정 선거 법 위반자의 처단.
  • 불법 축재 몰수 등 6가지의 4월 혁명 완수 정책.
  • 부재 지주의 토지 겸병의 불법화.
  • 주요 농산물에 대한 가격 보증 제도 등 3가지의 농어촌 진흥 정책.
  • 계획 경제와 자립 경제를 혼합시킨 계획성 있는 경제 체제의 확립.


1960년 7월 29일, 제5대 총선을 치르고, 전국 득표율 6%.. 민의원에서 4석, 참의원에서 1석을 차지했다.(당시, 사회대중당은 경상도에서의 호응이 상당했다. (특히 대구광역시부산광역시일대가..) 예를들어, 사회대중당 선거 연설에 대구에서만 약 4~5만 명이 모였다고 할정도...## 반면, 서울은 겨우 3천명 왔다고 한다.

7.29 총선때, 사회대중당은 사실 6% 득표보다 더 많은 지지율을 받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당內 계파 다툼과 공천문제로 분열이 매우 심각했었다. 어느정도였냐면, 한 예를 들어서 부산 동래구에만 사회대중당 소속의 4명의 후보자가 한꺼번에 지역구 출마를 낸 것을 비롯해 모두 5곳에서 2명 이상의 후보가 같은 당 간판 아래 출마한 이런 병크같은 사례가 나돌급이었다.(...)# 이런식으로 계파 싸움과 분열로 단일화하지 못해 전국적으로 갈라져버려 많은 득표를 얻지못하고 사회대중당은 커다란 한계점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961년, 5월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쿠테타 세력이 정치 활동 전면 금지령을 내리면서 사회대중당은 해체되고 역사속으로....

여담으로 당시 "혁신계"라고 불리던 집단 중 북한과 연계된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1차 인민혁명당 사건[2] 당시 항명파동[3]으로 사표를 쓰고 퇴직한 어느 한 검사는 "당시 혁신계라고 불리던, 사회대중당과 625당시 북한에서 월남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질이 가장 안 좋았다"라고 평가한다.[4][5]

  • 대표적인 정치인
  • 역대 선거결과
    •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 - 6.0% 득표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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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시에는 좌파, 진보라는 단어보다는 혁신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이는 일본의 영향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혁신이라는 단어를 "진보"처럼 사용했고, 당시 일본에서 우파들이 진보라는 단어를 썼다. 심지어 일본진보당(1945년)은 전시의 익찬회의를 뿌리로 하고, 2차대전 당시 입헌민정당이 모체다.
  • [2] 제1차 인혁당 사건 자체도 사실 아무런 실체도 없는 용공조작사건이다.#
  • [3] 검사들이 상부의 무리한 수사요구에 "증거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라며 항명한 사건.
  • [4] 출처 : «사법살인 - 1974년 4월의 학살». 천주교인권위원회 편저
  • [5]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 당시 사회대중당의 구성을 보면 정치성향 스펙트럼이 넓었던 점이 특징인데, 당장이라도 해방정국때 반공주의 활동했던 인물들도 제법 있었을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민족일보 사장이었던 조용수, 한민당 출신이었던 서상일, 좌우합작,남북협상 주도인물이었던 김규식의 비서로 지낸 송남헌, 안창호 선생의 비서로 지냈던 구익균, 심지어 해방정국때 우파정당이었던 한독당 출신인사들 등 있었을 정도였으니...